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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 Eun Young

회화의 진실, 진실의 회화 ; 표면과 이면을 넘어 / 윤익영

허은영 작품에 부쳐

왜 겉과 속은 다른가? 옷의 안감과 겉감이 다르고, 털장갑은 왜 안과 밖이 뒤집혀 있는가?

마음이라는 안감과 표현이라는 겉감 너머에 무엇이 그려지는가? 표면적 현실의 이면에 내재하는 심층적 현실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회화의 진실, 혹은 진실의 회화를 일구는 허은영의 최근 작품들이 갈수록 의미가 깊어진다.

물 컵이나 유리병은 두 말할 것 없는 흔한 일상품이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서도 곧잘 뜻밖의 진실을 찾아내곤 하는데 허은영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컵을 통해 우리의 참된 생활과 예술, 깊은 마음 속 진실과 삶의 진정성을 발견한다. 그에게 생활의 발견은 곧 예술의 발견이며, 그것을 이미지로 비유하는 것이 최근의 작업들이다. 왜 컵이었을까? 그는 컵이 자신의 일부처럼 보인다고 했다. “때때로 우리 몸의 일부와 같이 여겨질 만큼 친숙한 사물이지요.” 그리고 그는 자기 몸속으로 들어와 동질화 된 컵 속의 이물질들을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타자들이 내 안에 들어와 내 행세를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다시 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나 이외의 대상, 그러니까 타자와 엮어지는 관계와 소통에서도 저 컵처럼 우리와 함께 존재합니다.” 컵의 기능이나 생김새, 그 쓰임새가 우리의 삶이나 의식구조, 정신 등과 상응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팎이 동시에 보이는 사물을 놓고 그가 조응하는 것은 우리의 표면적 삶과 내면적 삶의 구조에서 새어나오는 한줄기 빛, 진실의 문으로 인도하는 빛이다. 그 때에 희열도 있다. 그는 컵이나 유리병을 통해서 안과 밖, 채움과 비움처럼 상반된 것이 공존하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칼로 오려 내 속이 보이는 그의 캔버스는 표면과 이면이 동시에 보이도록 했는데, 그 속을 채운 것들은 언제나 예상 밖의 이물질들이다. 우리 마음의 진실 된 일면을 비추는 것일까? 몸과 마음의 분리현상? 이 같은 그의 조형적 전략은 우리로 하여금 육안과 영안이 바라본 이중 진실의 교차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컵은 안과 밖이 동시에 보이기에 투명한 구조를 지녔다. 투명한 유리병은 자기 자신보다도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더 목적이 있다. 이 물건들은 자신과 섞이지 않은 이물질들을 담음으로써 충족 된다.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두었는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두 개의 컵으로 표현한 시리즈 작품은 자아와 타자 간에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이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나와 대상의 존재적 의미를 새롭게 관조하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구조주의 시각을 지닌 화가 같기도 하다.

컵은 늘 같은 모습이지만 그 속을 지나간 것들은 다 다른 것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헤라클레이토스)”처럼, 컵에 담겼던 것들은 늘 새롭다. 강이라는 표면과 그것을 이루는 이면의 물이 다른 것처럼, 컵의 표면과 그것을 채우는 내용물은 언제나 다른 것이다. 강물은 흐를 때 강이 되고, 컵은 채움과 비움이 반복될 때 컵이 되듯이, 표면과 이면의 진실 속에는 어김없이 예술적, 지적, 신앙적 진리추구의 본질이 서려있다.

이 점에 볼 때, 낡은 구두 한 짝을 그린 반 고흐의 <낡은 구두>를 놓고 논쟁을 벌인 철학자들과 미술사학자의 집념도 다 까닭이 있어 보인다. 벗겨진 구두 ‘내부의 틈새’에서 고된 들판의 노동이 응시 된다는 하이데거, 낡고 주름진 구두의 ‘표면’에서 인생역정이 담긴 화가의 자화상을 보는 사피로, 그것이 농부의 것이던 화가의 것이든 그 구두는 벗겨지고 신체에서 ‘떼어져 나온’, 주체에서 분리된,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담론의 맥락 속에서나 존재하는 타자에 불과하다고 역설하는 데리다…… 이들 모두는 그 그림의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의 그림이 무엇인지 찾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공공의 질문에 진지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응답하는 허은영의 근작들에서 삶과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윤 익 영/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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