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o, Eun Young

허은영, 영혼을 돌보다 / 서성록

마음은 전인을 아우르며 전인을 지휘하는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이다. 인간의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중추적인 책임부서인 셈이다. 그래서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 행동을 지배한다. 행동이 마음의 간섭을 받는다면 참된 것을 추구하나 욕심의 간섭을 받는다면 헛된 것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행동거지가 갈린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미스터리의 세계요 동굴속의 금맥과 같다.

허은영씨는 우리를 마음의 세계로 초대한다.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세계를 눈앞에 펼친다. 마치 어릴 적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밖을 보았을 때의 광경, 즉 밤새 흰눈이 쌓여 대지를 하얗게 수놓고 있을 때의 기분이 든다. 뜻하지 않은 눈꽃송이의 방문이 얼마나 마음을 들쑤셔놓았는지 모른다. 이런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이 지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어김없이 다양한 크기의 상자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캔버스를 지지체로 사용하여 그 위에 여러 겹의 한지를 겹치고 난 뒤 화면에다 네모형상으로 오려낸 부분에 한지상자를 끼워넣거나 그 아래에 접착시켜 상자의 속이 들여다보이게 구조물을 부착하였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상자를 한두 개 혹은 여러 개를 올려세운다.

작가는 이 입체 상자를 “개인적인 기억이나 경험의 암시적인 기록을 담는 콘테이터”로 부른다. 이를테면 ‘마음의 곳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깊이’를 내장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에너지’를 담지하는 소중한 장소다. 거기서부터 인간의 명령코드가 지시되고 총괄되며 조정되어 흘러나온다. 행동과 정서, 사고를 다루는 일종의 헤드쿼터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하나 확인할 수 있다. 그 상자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여러 겹으로 둘러쳐져 있다. 경계가 분명하여 안과 밖의 교감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계 자체도 여러 장의 종이가 포개져 단단한 층을 이룬다. 표면도 덕지덕지 흠집이 나 있고 거미줄처럼 줄이 그어져 있거나 찌꺼기가 모인 것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다. 얼핏 보았을 때의 평화스런 표면이라는 첫인상은 물러나고 차츰 모종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을 전달받게 된다. 작업도중 우연히 생긴 흔적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든 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여기에 놓여 있다. 작가는 이를 ‘주름’이라고 부르는데 그 주름은 삶을 압축적으로 표상하는 이미지다. 얼굴의 주름살이나 돌의 결, 그리고 지층의 무늬들이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증거하듯이 그의 ‘주름’은 자아의 역사성,시간성을 내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자의 주름은 자아 내면에 내장된 ‘어떤 벽’을 암시한다. 그것은 고립무원의 단절감일 수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사연일 수도 있으며, 일그러진 마음일 수도 있다. 작가는 상자를 바깥쪽으로 드러나게 하여 의도적으로 ‘환부(患部)’를 조명한다. 사람들은 안으로 병들어 있으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공개하기를 꺼린다. 실제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받아들일 준비가 채 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상처를 공유하여 고통을 덜거나 없애버리는 일은 전문집단의 몫으로 떠넘긴 지 오래되었다.

작가가 마음의 증상(症狀)을 테마로 작품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천년 초에는 씨앗에 착안하여 생명의 귀중함을 노래불렀다. 그때는 풍부한 색감을 한껏 사용해 지하에 뿌려진 씨앗이 추위를 이기고 지상으로 올라와 새 싹을 틔우고, 마침내 어엿한 나무로 자라 무성한 이파리를 내며 푸짐한 결실을 맺는, 일련의 생태적인 프로쎄스에 의거한 작업을 했다. 물론 작가의 이런 생태적 관심은 물리적인 데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땅에 생명의 씨앗이 뿌려져 튼실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숙’과 ‘하늘의 은총’을 나타냈다.

작가는 근래에도 메타포를 어김없이 기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상자는 ‘마음’이며, 종이겹은 ‘상처’, 표면의 어눌한 스티치(stitch: 자수 편물 재봉 등의 한 바늘,한 번 수놓기,한 번 뜨기, 한 번 감치기 등을 일컫는 수예수법)와 매듭 등은 불안하고 부정적인 ‘내면을 매만지는 행위’를, 하얀 바탕은 황량한 벌판같이 의지할 곳없는 ‘현실공간’, 바탕의 주름은 얼룩진 ‘애옥살이의 삶’을 각각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 근작은 종래의 작품에 비해 한걸음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전의 작품이 희망적ㆍ낙관적이라면, 근래 작품은 비관적ㆍ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 허은영씨가 강조하려는 포인트는 ‘상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에 있다. 치유를 말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밝혀야 하기에 먼저 내면에 손상을 입고 곪은 구석을 드러내는 고육책을 동원한 셈이다. 한지를 층층이 배접해가며 네모상자의 한지를 몇 겹으로 포개 네모 안을 보호하는 것, 스티치기법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우르는 것, 더러는 간구하는 손, 기도하는 손, 위로하는 손의 이미지를 각인하는 것은 ‘온전한 삶’으로 나가게 만드는 적극적인 몸짓에 다름 아니다.

몸에 내주하는 영혼을 잘 돌보는 일이 우리 몸을 자꾸 흙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창작의 세계도 더 넓어질 뿐만 아니라 예술품 자체에 참다운 의미에서의 생명이 실린다. 허은영씨는 마음의 관리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시급한 과제라는 것을 의미심장에게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