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o, Eun Young

한지의 조형성 속에 내재시킨 ‘치유’의 표현 / 오세권

허은영 작품의 주요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한지’이며 내용에 있어서는 ‘치유’라는 개념을 도입시킨다. ‘치유’란 일반적으로 비정상적 상태를 정상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육체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적인 치유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는 ‘마음’을 상징하는 사각 상자를 여러 겹의 한지로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한지’ ‘치유’ ‘마음’ 이 서로 작용하고 보완하여 작품세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한지를 재료로 하여 은폐된 내면의 억압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허은영은 재료 탐색의 기간을 거쳤다. 이전의 작품에서는 사진과 OHP필름, 한지, 오브제 이용, 복사라는 재료의 이용과 제작 과정을 거쳐 작품을 표현하였고, 때로는 천에  박음질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으로 작품을 실험하고 제작하였다. 그리고 2000년 이후부터는 줄곧 한지를 재료로 하면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한지는 책이나 그림을 그리는 재료로서만이 아니라 종이옷, 종이 갑옷, 종이 요강, 종이 촛대, 종이 옷장, … 등을 만드는데 있어서 우리 조상들과 오래 동안 생활을 같이하여 왔다.

미술 작품 제작에 있어서는 바탕재료로서 사용되어 왔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단순한 바탕 재료의 개념을 넘어 종이 자체가 메시지를 지닌 재료로 보고 있다. 즉 종이 그 자체를 작품으로 보는 것인데 재료의 개념과 작품의 개념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를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지는 미술 표현에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는 ‘바탕재료’적인 측면과 종이 그 자체가 작품화되는 ‘오브제’적인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지를 이용하는 표현의 경향이다.

국내의 현대미술에서 한지를 이용하여 오브제적인 측면의 작품을 보인 것은 1960년대 실험적인 한국화에서 부터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한지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이용한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특히 한지를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대표적인 단체는<한지작가회> 였다. 이와 같이 한지를 이용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한지 자체를 재료화 시키고, 그 재료 자체에서 나타나는 조형미를 찾아보려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허은영은 한지의 특성을 이용하여 조형미를 추구하는 표현 가운데 한지의 바탕재료적인 측면과 오브제적인 측면을 동시에 이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색채를 칠하여 그 효과를 얻는데 있어서는 바탕재료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부조와 한지의 겹침 등 질료적인  효과를 얻는데 있어서는 오브제적인 측면을 이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지 위에 색료를 더하여 회화 표현을 한 것은 바탕재료적 측면이고, 한지의 물성을 이용하여 한지의 질료적 측면이 드러나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오브제적인 표현이다.

작품의 제작방법을 보면 먼저 한지를 여러 겹 캔버스 위에 붙여 화면의 기반을 한지로 만든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약간의 부피감이 있는 것은 먼저 입체적인 물체를 이용하여 바탕처리를 하고 그 위에 한지를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색료를 한 겹, 한 겹 칠하여 올린다. 그러한 색료의 이용은 한지의 부드러운 특성을 살리기도 하고 층을 이루어 딱딱한 질감을 나타나게도 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화면의 가운데 부분은 뚫어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낸 자리에는 겹겹의 한지로 만들어진 사각 상자를 장치한다. 그러므로 가운데 구멍이 있는 평면과 구멍에 맞게 만들어진 사각상자가 조립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즉 허은영의 작품에서는 한지가 바탕되어  작품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상자가 조립됨으로서 입체적인 부조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허은영은 한지를 이용함에 있어 재료의 특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 치유라는 의미를 내재시켜놓았다. 그는 앞서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마음’이라는 사각 상자의 상징적 형태를 작품에 장치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의 기록을 담아놓는 상자로 자신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곳간이고, 영혼의 에너지를 담아놓은 장소로 상정된 것이다. 그 마음의 상자들은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형태들을 지니고 있다. 한지로 겹겹이 겹쳐져 마치 마음의 주름처럼 여러 가지 변화를 지니고 있는데 삶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상자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겹겹이 쌓여진 종이겹은 삶 가운데 나타나는 상처와 같은 표현이며 다양한 마음의 변화와 상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허은영은 그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상처를 아우르고 쓰다듬어 치유의 관계를 설정한다. 마음을 열어보이듯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한지의 상자를 열어 보이면서 치유의 관점에서 포용하고 매만지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허은영의 작품세계는 한지를 바탕재료로 하면서 오브제적인 조형적 실험을 겸하고 있다. 동시에 마음의 치유를 내재시켰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각의 한지 상자는 ‘마음’을 담는 상자로 상징화한 것이며 그 상자에서 나타나는 마음들의 은폐된 상처치유를 통하여 새롭고 온전한 영적 생명으로 살아가려는 의도를 작품 속에 내재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 오세권 (미술평론가, 대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