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의 작업에서 나는 내적 생명과 존재에 관한 관심을 씨앗이나 상자작업을 통해 표현해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물리적, 시각적 직시가 아닌 관조적 응시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시선을 약간 돌려서 컵을 바라본다.
컵은 사람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일상의 물건이면서 때때로 우리 몸의 일부와 같이 여겨질 만큼 친숙한 사물이다.
우리는 컵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마시면서 자신의 신체가 그 물질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우리의 의식도 그 순간의 상황과 정서를 함께 받아들이며 조응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컵이 그저 단순한 용기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를 담고 비우고 씻어내는 등의 행위 자체가 인간의 정신작용과 여러 면에서 상응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또한 컵은 인간 존재의 내적 관조의 순간은 물론, 나 이외의 대상과 엮어지는 관계와 그 소통에 있어서도 체화된 사물로서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
최근의 작업에서 나는 지극히 단순하고 전형적인 컵의 모양을 이용하되 그것을 조형적으로 합체하거나 분리하는 등 새롭고 낯설게 재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내면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의 조형적 형태와 이미지에 따라 정서적 상황이 새롭게 부여된 것으로, 특히 두개의 컵으로 표현한 시리즈 작품은 자아와 타자 간에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이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나와 대상의 존재적 의미를 새롭게 관조하게 한다.
부조와 같이 약간 돌출된 컵에는 용기의 입구를 의미하는 타원의 구멍을 뚫었는데 이것은 이전의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외부와 내부라는 상반된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2차원의 회화적 표현에 3차원의 입체적 공간을 혼합하는 형식이다. 그 타원형의 입체 공간 내부에는 커피로 물을 들인 한지를 잘라서 겹겹이 채워 넣었는데, 한지의 결이나 레이어가 보이는 컵의 내부 공간에는 숱한 삶의 순간들이 집적되어 있기도 하고 또는 그 흔적이 사라진 채 비워있기도 하다.
인간은 그 내면에 어딘가 어느 만큼은 굴곡진 부분이 있다. 나는 작업 과정을 통해 그 내면을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시선으로 다시 들추어보고 매만진다. 이것은 삶의 경험이나 기억, 시간과 영혼을 아우르는 내적 응시를 통해 그 정서를 다시 돌보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허은영 / 작가노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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