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eo, Eun Young

작가노트 / 씨앗의 기다림으로부터 ’09

씨앗의 기다림으로부터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서울은 시골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집과 동네 주변에 온통 초록의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훌륭한 놀잇감이 되어주던 풍성한 자연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빛깔 그대로의 추억임을 본다.

유난히 즐기던 소꿉놀이를 위해, 틈만 나면 산과 들을 뒤적이곤 했다. 주머니마다 불룩하게 채워 넣고도 모자라 치맛자락을 들추어서까지 담아왔던 예쁘고 신기한 열매, 씨앗, 꽃, 돌멩이들. 그것들을 보물처럼 마당에 펼쳐놓을 때의 기쁨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신나게 놀다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한바탕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치워야 했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예쁘고 특별해 보였던 것은 따로 챙겨서 방안 서랍이나 상자에 담아 두곤 했다. 특히 모양과 크기 그리고 색깔도 각기 달랐던 열매나 씨앗들은 한 번 놀고 그냥 버리는 일이 없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싹이 트고,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는 과정은 어린 아이의 눈에 너무나 신기한 것이었다. 그 숨겨진 비밀을 탐색하고자 그것들의 껍질부터 속까지 해부하듯이 벗겨내 보고, 무언가를 녹인 물에 그것들을 담가 놓거나, 칼로 자르고 으깨어보기도 했다. 온갖 자연의 산물과 씨름했던 그 시간은, 퍼내고 또 퍼내도 다시 가득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온 땅을 매번 푸르게 채워나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맘껏 누린 시간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한번은 서랍 안에서 잊혀진 채 더욱 단단하게 오그라든, 그야말로 작은 섬유질 덩어리에 불과해 보이는 오래된 씨앗들을 가져다가 마당에 심은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자 하나둘씩 반갑게 싹을 틔웠지만, 안타깝게도 끝내 싹으로 자라지 못하고 썩어버린 씨앗들도 많았다. 자연에서, 이는 전혀 새롭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까스로 빛을 보게 된 것들과 결국 살아나지 못한 것들, 그 숱한 생명들의 외로운 투쟁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은 그들 내면의 정서를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생명에 대한 경이는 물론, 그것을 향한 기다림과 소망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되었지만, 자연의 상징과 같은 씨앗에 대해 나는 여전한 애정을 간직한다. 어린 시절 관찰했던 씨앗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생명을 향한 기다림’을 시작으로 묵상, 새싹, 치유와 회복 등 생명과 관련된 정서를 그림에 표현하고 있다.

허은영 / 작가노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