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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 Eun Young

뚫려진 캔바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내적 공간에 대하여 / 이승훈

작가 허은영은 2000년대 초 부터 씨앗 등 식물과 같은 생태적 형상을 다루면서 차츰 오려낸 캔바스 속에 한지와 같은 물질을 겹겹이 채워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해왔다. 그 공간은 일견 ‘루치오폰타나’의 뚫려진 캔바스 공간 속에 펼쳐진 확장된 조형개념의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작업을 직접 감상하게 되면 그가 만들어낸 공간은 보다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공간으로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캔버스 안에 심어놓은 듯한 이 상자와 같은 공간을 ‘개인적인 기억이나 경험의 암시적인 기록을 담는 컨테이너’라고 하였다. 즉 평면과 입체 혹은 회화와 조각, 건축 등의 공간적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확장된 회화적 공간에 있어서 기호적 상징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 가운데 보여지는 이미지는 이전의 전시에서 보여주었던 네모난 상자의 모양과는 달리 ‘종이컵’이라는 구체적 형상이 보인다. 각 작품마다 서로 마주보거나 교차되어 겹쳐져있는 두 개의 종이컵을 자세히 보면. 이전 작업의 사각형 상자에서 보이는 단순화된 형상으로 인해 약호화 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메시지들이 구체적인 종이컵이라는 형상과 그 두 개의 종이컵이 만들어내고 있는 표정과 같은 이야기들로 인해 좀 더 명료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전의 작업에서 네모난 상자는 하나의 개념적 틀로서 존재하였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두 개의 종이컵이 상징적으로 만나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와 같은 이야기들을 마치 다양한 글을 서술해 나열해 놓은 듯 조형적으로 배치하였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관객과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듯하다. 마치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이 보이는 종이컵의 형상은 서로 닮아 있으나 매번 서로 다른 위치와 방향으로 만나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종이컵으로 치환된 관계의 담론은 인간에게 있어서 만남의 상황과 조건들에 의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삶의 여러 가지 의미를 만들게 되는 현실을 사색하게 만들기도 하고 서로 다르면서 또한 같은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 두 개의 컵의 관계에 이전 작업의 상자에서 보이던 구멍 뚫린 캔바스 구멍 안에 박스와 같은 틀을 새 작업에도 동일하게 이용하여 안과 밖이라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가고 있다. 그리고 종이컵 속 안 부분에 채워진 한지에 의한 공간은 상자 잔에서 보이던 공간보다 좀 더 분명하게 안과 밖의 경계 차이를 느끼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컵의 바깥 공간과 안 공간의 경계로 인해 생긴 타원형의 구멍 안에서는 겹겹이 겹쳐진 한지의 층위들의 사이 사이에는 작가의 언급처럼 ‘기억 혹은 경험의 기록’을 담아 놓은 듯 커피라는 물질이 하나의 염료처럼 한지에 번져가는 시간적 흐름의 궤적이 좀 더 명확하게 흔적으로 남겨져 있는 듯 하다.

작가 허은영에게 있어서 이 뚫려진 캔바스의 여러 겹의 한지를 머금고 있는 상자와 같은 틀의 공간 구조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에 형상적 컨텍스트로 작동하여 개인적 기억과 경험적 차원의 이야기들이 인간의 보편적이며 상징적 차원의 이야기들과 조우하도록 만드는 기제이며 조형적 장치가 되고 있다.

결국 작가는 개인적 차원의 기억과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한편으로 유사하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그의 작업을 통해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면에 쌓여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이야기들에 대한 사색적 대화의 장을 회화적 공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내면의 비언어적 영역의 소통과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승훈 (사이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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